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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_사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11.08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 2014.02.28 모두 알았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제 블로그를 찾았던 어떤 분의 사이트를 답방 차 찾았는데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단락이 아주 긴 시(좋은 글)를 보았습니다.

- 가끔 생각나는 사람??? -

누가 있을까? 누가 있을까? 하다가 퍼뜩 스치는 게 있었습니다.

 

사십여 년 전에 잃어버린 염소와 그 염소를 훔쳐 갔을 누군지는 몰라도 그 도둑놈이 말입니다.

마을 위쪽의 깊숙한 산골짜기에서 살다가 마을 아래쪽 그도 가장 아래쪽인 바닷가로 이사 온 지 5년쯤 됐을 때 이야깁니다.

 

산골짜기에서 살았기에 산길에 능숙해서 산길로 다니나 한길로 다니나 초등학교 오가는 길이 거리에서나 좀 차이가 있었을 뿐 그 외 별다른 이점은 없었는데도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새롭게 출발하려고 했던 우리 부모님 결정은 옳은 거였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론 산골짜기에선 수리가 이따금 염소 새기를 채갔다는데 제가 어렸을 때 그랬었는지 제 기억엔 그런 게 없습니다.

 

비가 많이 내릴 땐 집 앞으로 난 도랑이 엄청난 기세로 흘렀다는 거, 작은 초가에서 안방 옆으로 마구간으로 쓰는 지붕 대들보와 서까래가 뻔히 보이는 사이를 뱀(집안에 쥐를 잡아먹는 뱀이라고 해서 우리는 집 지키는 뱀이라고 했다 - 구렁이) 오갔다는 거 시절에 따라 온갖 과실과 도라지 취나물을 비롯해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넘쳤다는 거 그런 따위 기억들을 보듬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바닷가에선 그런 것들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토끼를 키울 땐 일찌감치 제대로 못 먹여(더 정확히는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지 못해서) 죽고야 말았고, 염소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을 만한 풀이 있어 보이는 집에서 다소 먼 곳까지 가서 목줄을 매 놓은 뒤 학교에 다녀오곤 했었습니다.

 

~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출처: 카카오맵(2020-11-07)

 

어제 카카오맵에서 떠온 그 시절에 살았던 지역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A로 표시한 부위 주변이 온통 이름 모를 묘지로 가득했었는데 오늘날은 본래의 이름 '공동묘지'에 어울리지 않게 온통 잡초와 잡목이 우거진 정글 그 자체더라고요.

그곳 공동묘지 오른쪽으로 작은 계곡이 있는데 그곳이 그나마 찾는 이가 적어서 그랬던지 염소가 먹을만한 풀이 듬성듬성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곳이 저로선 염소 매 놓을 장소로 최적지였었죠.

아무리 최적지라 해도 계속해서 무한정 풀이 나는 것도 아니기에 염소로서는 매우 불편했을 겁니다.

당시와 그 뒤로도 당분간은 거기 공동묘지 주변이 나무보다는 잡초가 더 우거졌기에 땔감 하러 나설 때 거기서 재를 하나 넘어서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곤 했었는데 그곳은 '독다물(시신 위를 돌멩이들로 덮은 무덤)' 사람들이 무서워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저도 좀 더 커서야 그 자리에 죽은 나무 그루터기나 위쪽을 베어낸 그루터기가 있어 가끔 캐 오곤 했었는데 저에겐 그 바닷가에서 땔감 구할 장소로 거기가 최적지였죠.

 

- 독다물엔 일정한 거처 없이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사람(행려자 또는 부랑인 등등)이 주로 묻혔다고도 하더라고요 -

- 바닷가에선 아주 드물게 이름 모를 시체가 떠밀려오곤 했습니다. -

 

1975년 그해 그날도 어김없이 그곳 공동묘지 계곡에 염소를 매어 두고 학교에 다녀왔는데 염소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맸건만 허사였던 어느 날 우리 마을 누군가가 그곳 산자락(제가 땔나무 구하려고 들어갔던 산자락의 아래쪽)에서 주춤거리며 나오는 걸 누군가가 봤다고 우리에게 연락해 줬어요.

대번에 의심할 수밖에요.

 

- 자기는 뒷일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산속에 들어가서 보고 왔을 뿐인데 왜 멀쩡한 사람 잡느냐며 역으로 막무가내 찾아와 우리 아버지 멱살 거머쥐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

천하에 착실한 사람이었기에 듣고 보니 그분 말도 일리가 있긴 있데요.

그러나 당시엔 아버지 목매다는 그 사람 내가 크면 기어이 작살을 낼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그분이 또 우리 마을 아니 우리 지역에서 꾀 잘 나갔던 유지의 처남이기도 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산중에서도 온통 고생만 하셨는데 내려와서도 어떡해서든 자리 좀 잡아보려고 무리하셨나 봐요.

1971년에 내려와서 2, 3년도 안 돼 시름시름 앓더니 멀쩡한 날보다는 몸져누운 날이 훨씬 더 많아졌죠.

그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바닷일을 조금씩 배우긴 했어도 초등학교 4, 5학년이었던 제가 뭘 얼마나 배웠겠어요?

그렇게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는 1976년 그해 제가 보는 앞에서 딱 한 호흡만을 남긴 채 가시더라고요.

 

그렇게 우리 아버진 공동묘지가 있던 지역 A에서 저 위쪽에 묻혔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파다가 우리 문중 가족 묘원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 축축한 지하 그 자리서 지저분하게 덜 썩은 옷자락과 온통 얽혀서 손가락 감촉으로 발라야 했을 때의 그 기분!!! -

- 세월호 유가족도 이랬겠구나! - 싶었습니다. -

 

아버지 멱살 잡고 처맸던 그 사람도 그 뒤로 얼마 사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훗날 광주에서 명절이나 그런 때 아버지 묘소 찾아갈 때는 그분 산소를 지나쳐야 했습니다.

그분 산소는 비교적 더 깔끔했기에 어찌 보면 아버지 산소를 찾는 이정표 노릇도 한 셈입니다.

 

그림에서 'B' 지역 모양새가 밭처럼 보이지요? 네. 맞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이 밭이었어요.

그것도 우리 지역에서 대단한 아까 그분(유지 - 대의원)의 땅이며 밭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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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

시대: 현대

성격: 헌법기관

유형: 제도

시행일: 1972년

폐지일: 1980년 10월

분야: 정치·법제/법제·행정

요약 1972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조직체.

 

내용

조국 통일의 정책에 관한 국민의 주권적 수임 기관으로서 1972년에 개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서 새로 설치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2,000인 이상 5,000인 이하의 대의원으로 구성되고, 대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현재 30세에 달한 자로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국민주권을 성실히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다.

 

주요 임무는 통일에 관한 중요정책의 결정, 또는 변경에 있어서 국론통일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통일주체국민회의 심의에서 재적 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통일정책은 국민의 총의로 보게 되어, 통일정책의 최종결정기관이었다.

 

또한, 토론 없이 무기명투표로 대통령을 선거하고,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선거하였으며, 그 밖에 국회의원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을 국회 의결 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의장은 대통령이 맡았으며, 회의를 소집하고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집회 시마다 운영위원 중에서 약간명을 지명하여 교대로 의장을 대리하여 회의를 주재하게 할 수 있고, 대의원의 자격심사와 징계 및 그 밖의 필요한 사항을 심의하게 하기 위해 의장이 지명하는 20인 이상 50인 이하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를 두고 있었다.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본래의 설치목적과는 달리 사실상 대통령을 선출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서거와 더불어 1980년 10월 개정된 「헌법」으로 이 기구는 폐지되었다. 이 기구의 근거법인 「통일주체국민회의법」은 국회에 의한 법률 개폐 과정을 거치지 못하여 그간 현행 법률로 남아 있다가 2018년에 들어서야 폐지되었다.

 

※ 출처: 다음백과(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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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돌아가셨기에 그분이 동생이 대신 밭을 지었는데 어쩌다가 산소에 들리던 중 그분 내외가 밭에서 일하시는 걸 보고 매우 반가웠던 적도 있었어요.

그분 역시도 나중에 돌아가셨지만… 그 형제들 너무나도 좋은 분이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던 집의 본래 주인이었는데 새집을 지어 이사하면서 거기 빈집이 생겨 우리가 내려갈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유지(?)였지만 거들먹거리는 걸 평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70년대 우리 마을에 달랑 두 대의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그 집과 같은 길거리에서 논 하나를 사이에 둔 제 친구 집으로 모든 동네 주민이 양가에 모여 텔레비전을 봤었죠.

안방 앞의 마루에 텔레비전 올려놓고 마당엔 평상을 두고 거기 V자로 앉고 그 곁을 온통 둘러싸고 마당이 다 차면 집 밖의 담벼락에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면서 텔레비전 봤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그 시절 어여뻤던 드라마 주인공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계실까요?

드라마 '복녀'에서부터 '전우'며 또 우리 지역의 스포츠맨이었던 레슬링의 '김일'이나 복싱에서 '유제두'…

 

세월 참 무상합니다. 'B' 지역 밑으로 급경사가 있고 바닷가였던 'C' 지역엔 'B' 지역의 밭보다는 폭이 좀 좁았지만, 그만한 크기의 평평한 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밭 밑으로 그 밭만 한 크기의 온통 자갈로 이뤄진 바닷가가 있었거든요.

 

그 바닷가 아래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예쁜 모래사장이 바닷물과 함께 있어서 밀물 때는 사라져도 간조가 되면 시원하게 드러났던 곳입니다.

개펄이 아니고 고운 모래에서는 조개도 드물었습니다.

그랬어도 우린 물이 쭉 빠지면 삽을 치켜들고서 그곳으로 내려고 콕콕 쪼면서 지나가곤 했었지요.

 

그러다가 '콕' 하면 잽싸가 부리나케 삽질해대고 했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그 색상이 온통 하얀 우럭조개(주로 개펄에 살더구먼)는 잡아 봤어도 그 색깔이 노랗고 예쁜 모시조개(주로 모래에 살더라)는 한 번도 못 잡았답니다.

그것 발견하는 순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잡아야 하는데 조금만 늦어도 구멍 깊숙이 들어가 버리거든요.

낙지도 똑같아요. 그렇지만 낙지는 주로 개펄에서만 살고 들어가는 좁은 구멍만 잘 틀어막으면 그 압력 차 탓에 멀리 도망가지 못해 다른 방향에서 파 들어가 잡았다는 얘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그렇게는 못 잡아 봤고 주로 간조가 심할 때 큰 바윗돌을 넘어뜨려서 그 속에 숨은 돌게나, 장어 혹은 어쩌다가 낙지도 잡아보곤 했는데 그보다는 주로 통발을 통해 게도 잡고 장어나 낙지도 잡았답니다.

해안침식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 자리가 저렇게 돼 버렸을까요? 안타깝습니다.

 

'D' 지역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았네요.

제가 근무했던 초소의 내무반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1974년 그해는 제게 몹시 서글픈 해입니다.

그보다 몇 해 전 우리 막내 이모님이 가마 타고 시집가는 걸 봤었는데 그 이모님이 하시던 가게에서 고흥의 어느 가게에서 누군가에게 피살되셨어요.

그렇게도 금실 좋았던 이모부님이 혐의자로 몰려 한참을 고생하셨지만, 끝내는 무죄로 풀려나와 얼마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그 범인은 아직도 찾지 못해 미스터리로 남았죠.

그해는 또 독재자 박정희의 부인이었던 육영수가 재일교포였던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죽었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해에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그곳(D 지역)에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 들어왔었죠.

우리 마을을 비롯하여 온천지가 비상사태가 됐었습니다.

 

그러든 말든 제게 중요한 건 마구 날아다니는 헬리콥터가 신기했었고, 텔레비전에서만 봤던(전우) 군복 입은 군인들이 눈앞에서 총 들고 있다는 게 더 재밌고 신기했었답니다.

우리 마을에 들어온 군인들 대부분이 총만 들고 있었지 떨거나 긴장된 구석이라고 털끝만치도 안 보이더라고요.

그리했기에 쪼그려 앉아 쉬고 있는 군인(예비군)에게 다가가 그 총 한 번만 만져보자고 했는데 대번에 내주는 거 있죠.

 

상당히 무거웠습니다. 혹시 저처럼 87년에서 90년도 사이에 예비군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알 거예요.

그 시절은 아직도 가벼운 카빈총이나 엠원소총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훗날 짐작했습니다. 74년도 그때 본 총은 아마도 엠원이었을 거라는 걸 말입니다.

 

당시 그 자리서 접선했던 남쪽의 고정간접이나 북에서 내려온 간첩을 잡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시 그 자리에 초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해경(오늘날 해양경찰)이 들어왔죠. 그런데 내무부 소속의 이 사람들이 언제까지 근무했는지를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시골집에 가보니까 경찰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에 국방부 소속의 군인이 들어와 있습니다.

저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해변에 철책이 둘러쳐지고 사방으로 깨진 유리병이며 날카로운 쇳조각이 박혔습니다.

우리 동네가 간첩이 들어온 직방 지역이었기에 그 규모도 커서 소대장이 머무는 장소가 돼버렸어요.

 

온갖 노력으로 현역에 갈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하여 방위병(단기사병)이 됐던 저!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 그곳으로 출퇴근했었답니다.

 

저를 비롯한 단기사병 모두가 그래도 거기서 현역 못지않게 할 건 다했을 겁니다.

- 실탄 사격 -

- 완전군장으로 야간 순찰 -

- 무전병으로 상황실 근무 -

- 짬장으로 병사들 먹거리 보호하고 지켰지! -

- 이발병으로 병사들 미용 보호하고 지켰지! -

 

현역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출퇴근 못 하는데 단기사병은 가능했다는 것! 그것뿐이었죠.

사이는 좋았습니다. 현역이든 단기사병이든 절대로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었고요, 말투에서도 직급에 차별 두지 않았었지요.

어쩌면 소대장이 거기서 가장 힘들었을 거예요.

- 왕 소대장님! 저 중근입니다. 그 시절 본의 아니게 무척 죄송했네요.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

 

무지무지 정이 넘쳤던 배나무골 상호도 그립고요,

천하의 말썽꾸러기 역시나 같은 동네 영화도 그립네요.

상호야 영화야 보고 싶다!!!

녀석들도 지금쯤은 나처럼 쉰을 훌쩍 넘어서 환갑으로 가고 있으려나….

 

처음엔 누군가로부터 '가끔 생각나는 사람'에서 출발했는데 꼬리가 꼬리를 물어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인제는 하차해야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생각나는 사람이기보다는 '억^ 그 쳐 죽일 놈!!!'로 기억될 게 뻔해서 더 써봐야 제 얼굴에 침 뱉는 꼴밖에 안 될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꼭 누군가로부터 아련함으로 따스함으로 기억되길 희망합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Posted by 류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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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알았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는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이제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강신주 <강신주의 감정수업> -

 

 

어떤 것을 처음 대할 때의 호기심이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당연한 심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순히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상심한다면, 의심과 오해만 늘어가게 됩니다.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배려와 관심 속에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함께해야만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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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누군가를 흠모합니다.

그래요. 사랑은 호기심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환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기심 그 절대적 호기심도 알고 나면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잖아요?

그 환상이라는 것도 진실을 알고 나면 깨지고 말잖아요?

제게 남겨진 오늘의 사랑과 꿈!!!

그녀에 대해 아는 만큼의 사랑이고 환상이지 않을는지요.

 

= 수미야 수영아 몹시 보고 싶지만, 너희 얼굴도 잊어버렸다. =

= 현아야 미경아 흠 고미경이 내가 좋아했다는 거 알기라도 했니? =

= 고은경 네가 자고 가지만 않았어도 현아랑 안 깨졌잖아! =

= 신경자 씨! 실은 당신이 고백하기 훨씬 전부터 저도 당신 사랑했어요. =

 

그들 모두는 지금 아마도 누군가의 아내일 테고 또 엄마겠지요.

어쩌면 누군가의 할머닐 수도 있겠네요.

친구이기도 하고 동지기도 했던 내 사랑의 연인들이여!

건강하게 살아주세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남아주세요.

 

 

Posted by 류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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