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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18 '메리트!' 그러니까 그게 그런 뜻이 맞았었구먼!

'메리트!' 그러니까 그게 그런 뜻이 맞았었구먼!

 

 

한 20년쯤 됐을까요? 아니지. 그때가 2000년도쯤 됐을 테니까 더 정확히는 18년쯤 전에 말입니다.

최근 들어선 좀 애매한 사이가 됐지만, 아주 오랜 세월(80년대 후반에서 최근 애매해지기 전까지)을 굳게 믿고 지냈던 그랬기에 늘 한곳만을 응시하며 살았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2000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그 친구가 살던 지역이 제가 살았던 동네와도 가까워서 그만큼 만날 기회도 많았었는데 제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까 큰 테두리에선 한 지역(광주광역시)에 살면서도 이산가족이 됐던 겁니다.

그러던 차 어느 날 그 친구 살던 지역에 갈 일이 있어 만나게 됐지요.

 

저는 몸이 이렇게(장애) 되기 전 한참 전에 직장에서 밀려나면서부터 같은 곳을 바라보며 꾸리고자 했던 '업'의 현직에서도 멀어졌지만, 친구는 제가 처음 알게 된 그 전부터 쭉 해오던 업을 꾸준히 하고 있었기에 세상 물정에 저보다 훨씬 밝았었습니다.

우리 오래간만에 여러 이야길 나누던 중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이고 거기 메리트가 없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제 표정이 잠시 주춤거렸을 겁니다.

행동도 그랬을 거예요. 눈치 빠른 걔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지요.

그쯤의 활동가들 사이엔 너나들이하면서 주고받는 '말거리'였겠지만, 늘 우물안에 처박힌 제가 얼른 받아치지 못했을 걸 친구도 한발 늦어서 간파했을 테지만, 어쨌든 우리 사이 어색한 리듬이 잠시 머물렀어요.

 

저는 그 소리(Merit)를 듣는 순간 제가 아는 그에 걸맞은 뜻과 일치시키려고 안간힘을 쏟았지만, 그 어색함 천 분의 일 초도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제가 살던 고향(전남 고흥)에선 이런 말이 통용되곤 했었습니다.

- 야~ 거기 한 번 다녀와라. 너한테 좋을 건데… -

- 아이고~ 거기 무슨 부가 있어야 가죠!!! -

 

- 야~ 그놈은 그래도 괜찮지? -

- 아따~ 걔한테 무슨 부가 있다고요? -

 

그거에 이런 식의 '부' 말로 대처했던 걸 여러 번 경험(목격)했었답니다.

쉽게 말해서 친구가 '메리트'라고 뱉었을 때 저는 그걸 '부'와 연관 지으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겁니다.

 

시골에서 우리가 썼던 그 말의 의미는 '절대적 가치', '적기 적소의 쓰임새' 이런 말과 같은 뜻이었는데 친구가 뱉었던 그 단어의 의미도 그렇게 들린 탓이어서요.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오랜 세월 저는 그에 대한 실체가 궁금했지만, 막상 친구와 나눴던 그 단어(메리트) 자체가 그 뒤론 다시 떠오르질 않아서 그 허물만 간직한 채 이렇게도 긴 시간이 흘러버렸지요.

 

그랬는데 어제 낮에 텔레비전 보는 중에 귀신같이 그 단어가 퍼뜩 뇌리를 스쳤답니다.

그래서 혹시 또 잊어먹을지도 몰라 컴퓨터에 메모장을 열고는 거기에 적어 뒀어요.

 

그랬는데 그 직전에 컴퓨터에서 '모니터가 갑자기 먹지 되는 현상'에 관해 그 정보를 찾다가 아주 희한한 정보를 알게 되어 그걸 제 컴퓨터에서도 적용하고는 시험하는 중이었거든요.

인터넷 화면을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뒀거나 동영상을 보는 중에 화면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해서 멈춘 뒤 다시 살아나곤 했기에 제가 그것 바로 잡는 정보에 가깝도록 컴퓨터를 손본(제어판에서 전원 옵션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것) 뒤 그 추이를 기다리는 중이었으므로 나중에 그 정보를 네이버나 다음에서 확인까지 했으면서도 이렇게 곧바로 실리지 못했습니다.

 

~ 메리트(Merit)! 넌 누구냐? ~

 

오늘이 또 '5·18 민중항쟁일'이잖아요?

광주로는 들어가는 차도 없고 그렇다고 전화 같은 것도 안 되지 광주로 유학 보낸 시골집들에선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제 시골이 고흥인데 거기서 광주 들어오려면 화순을 거쳐야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굽이굽이 돌아서 목포로 갔다면 나주 쪽으로 들어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시골의 우리 부모님들 그래도 화순까지는 무난하게 버스 타고 오셨는데 화순에서 광주 들어오는 차를 막아버렸으니 더 들어올 수가 없었겠지요.

제가 살던 시골에서는 저와 함께 자취했던 친구를 비롯한 셋이 광주로 나와 유학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셋의 각각의 학부모 셋도 함께 올라왔던 겁니다.

 

그렇게 차로는 들어 올 수가 없으니까 화순에서 광주로 걸어서 들어오려고 그랬다네요.

그러자면 그사이에 굴이 있는 너릿재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그렇게 너릿재 터널을 지나 광주로 들어오는데 맨 처음 만난 광주 주민들이 들어가면 모두 죽는다면서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막아서더라는 거에요.

그렇게 양 이틀을 시도했는데 광주에 올곧게 들어오는 걸 실패하고 우리 어머니로선 '난생처음으로 화순으로 다시 돌아가 함께 온 마을 주민과 함께 여인숙이라는 숙소에서 자 봤다'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사흘째 되던 날은 죽든 살든 자식들을 보겠다는 고집으로 주민들의 만류를 뚫고 광주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광주의 가장 동쪽에서 가장 북서쪽이라고 해도 무방할 용봉동 제 자취방까지 찾아온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오셨던 그 길을 역으로 걸어서 광주를 지나 화순까지 갔었답니다.

역시나 어머니와 마을 분들이 그랬던 거처럼요.

 

그날이 5월 26일이었는데 그날의 광주 시내는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일 정도로 너무나도 한산했어요.

한마디로 해방의 광주(그 시점이 광주 시민이 주인이었기에 평온한 광주)였는데 그다음 날(5월 27일) 옛 도청을 점거하고 있던 시민군(?)을 쳐서 모조리 사살하거나 체포해갈 줄은 26일 상황에선 꿈에도 몰랐답니다.

 

'그런데 어머니! 가마니로 덮어둔 시체를 여러 개 봤다면서요? 어디서 봤다는 거예요?'

예전에 절 찾아오면서 시체 봤다는 소릴 했기에 듣긴 들었지만, 5·18에 시체 봤다는 이야긴 너무도 흔한 이야기라서 그냥 엉성하게 들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아침에 5·18 문제로 어머니와 언성이 높았던 것도 있고 해서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응. 맨 처음 광주로 들어오는데 너릿재 못 와서 봤어!'

'예?' 제 예상을 벗어납니다. 저는 화순에서 넘어와 너릿재를 지나 광주 쪽으로 완전히 들어와서나 봤을 거로 짐작했었는데 오늘 어머니 말씀은 아직 광주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너릿재 터널 안 곳곳에 가마니가 덮은 시체를 봤다는 거였습니다.

 

그것도 '가마니로 덮어뒀던 그 시체들이 그 첫날에만 있었지 그 뒤로는 또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더라~'

 

놀랍습니다. 그런 이야길 듣는 동안 또 시간이 지체되어 이제야 이 글을 쓰게 되네요.

 

- 오! 5·18의 숭고한 영령들이여. 부디 평안하게 잠드소서~ -

 

 

Posted by 류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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