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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06 고향 땅 순례기

고향 땅 순례기

짙은 녹색 2014. 11. 6. 15:52

고향 땅 순례기

 

벌써 사흘쯤 전의 일입니다.

고흥 시골이 고향인데 떠나온지도 꽤 돼서 그런지 찾을 일이 아주 드물답니다.

그런 탓으로라도 거기 시골 친구들하고 연락할 일도 뜸한 거고요.

그날은 그래도 그중에 그나마 연락이 잦았던 녀석(그 표현 무색하게도 한 해 걸러 한두 번꼴로 통화하는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요.

 

뜸한 연락이긴 해도 평일에 들어온 전화였기에 뭔지는 몰라도 분명 어떤 문제가 있을 거란 걸 짐작했지요.

아닌 게 아니라 문제가 있긴 있었더라고요.

 

시골에 들어와 살거나 아직도 거깄는 친구(사오십대 젊은 층을 통틀어서 친구라고 가정한다면)가 극소수 몇 놈이 있습니다.

게 중 한 놈의 아버님께서 운명하셨다고 그랬습니다.

 

당장에 떠날 순 없고 다음 날 보자고 전했더니 녀석은 또 무슨 사정인지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서 미안하다고 그랬거든요.

다음날 고향 땅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그 소식 전해줬던 그 녀석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알아보니까 어깨였던지 뭔가가 빠진 바람에 벌써 서너 달째 병원에 입원 중이랍니다.

어쩔 수 없지요. 우리끼리 치르는 수밖에…

 

요즘 들어서 찾았던 장례식 끄트머리엔 마치 관례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마지막 날은 꼭 화장장에 다녀와서 묻고 오는 게 일반이었거든요.

그런데 친구놈 이야기론 화장하지 않고 관째로 매장한다고 그러더군요.

'흠 그럼 뭐야! 상여를 메야 한다는 거야 뭐야!!!'

아버님 떠난 그 자리에서도 녀석 농담할 기분이 있었던지 저에게 앞소리 좀 해 주라 말합니다.

봉분으로 매장한다는 그 소리 듣자마자 그렇다면 반드시 당군(상여꾼)에 넣어주라니까 대뜸 한술 더 떠서 맨 앞에서 메면서 소리꾼 역할까지 담당해서 끌어주라는 겁니다.

 

'어~노 어허^ 노야 얼갈이 넘~자 너와 넘~어♬'

상여 중간쯤에 어깨에 올리고는 소리꾼 선창하는 거 뒤따라서 마무리 추임새 제창으로 따라 해보기는 한두 번 있었지만, 그것 앞소리 한다는 건 도저히 어려울 성 싶더라고요.

더군다나 제 몸이 좌우로 마구 흔들리니까 앞쪽에서 상여 멘다는 것도 좁은 길에서 매우 위험한 거가 됐을 것도 짐작했었고요.

중간에 끼어 있을 테니 더는 나한테 요구하지 말라고 엄포까지 놔 놓긴 했었지만…

 

해도 은근히 걱정이 들더라고요.

실은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장례식장에서 곧바로 떠나버린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장지까지 따라와서도 그것 관 들거나 메지 않으려는 눈치도 여럿 보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앞장서서 그 자리 껴 달라고 선수를 치긴 쳤었는데…

 

초장부터 제 예상 완전히 빗나갑니다.

상여를 메는 것도 아니요.

운구차에 싣고가서는 운구차에서 그 거 관 여럿이 떠메고 옮겨서 굴착기로 파낸 구덩이에 내리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물론 여러 잡다한 과정이 있긴 있었지만, 저나 제 친구들 끼어들 틈이 아주 적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운구차에 싣는 건 가족이나 제 친구들이 했고요, 나중에 장지에 가서는 운구차에서 무덤 파낸 자리에 내리는 부분(하관)은 제 친구의 동생 놈 친구들이나 매장일 전반을 해주기로 했다는 또 다른 가족이 맡아버린 겁니다.

 

저는 그렇게 부탁했었건만 그 어디에도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관이 구덩이로 내려갈 때 그 짧은 틈을 타서 온몸 버텨서 힘준 것도 아니고 겨우 그중 한 줄에 다른 친구 잡았던 걸 함께 잡아 내리며 시늉이나 했던 게 전부였답니다.

한마디로 친구놈 아버지 장례절차에 제가 취했던 건 껍데기 그 자체였고 꽝이었네요.

 

관이 내려가고는 그야말로 저는 할 일이 없어졌지요.

그러자 장례식장에서 장지가 그쪽에 있다는 소리 들었을 무렵 이미 세운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대로 그 옛날 제가 살았던 자리에 꼭 한번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미망인이 된 어머니한테 제 사정 들려줬더니 어서 그리해보라고 그러더라고요.

 

장지가 된 그 계곡이 바로 그 옛날 제가 살았던 계곡이었는데 벌써 그 자리 떠난 지(1971년 초)도 서른 해가 넘어섰네요.

초등학교 일 학년을 다니다가 나왔으니까 말입니다.

 

우리 살던 자리는 모두 네 집이 있었는데 세 집은 옹기종기 붙었었고요, 그 나머지 한 집만이 외따로 있어 산 아래쪽 큰 마을과 우리 세 집의 중간쯤에 있었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집 모두가 그 시점에서 큰 마을 세 갈래로 찾아들고 말았거든요.

그 네 집 모두에 나이 그만그만한 또래가 있었는데 저를 비롯한 셋은 한살이 많은 아홉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었고요, 한 놈은 여덟에 들어갔군요.

 

그러했음에도 우리 집은 여전히 그곳 산지에 일궈둔 큰 밭이 있었기에 아주 오랜 세월 거기를 오가면서 어머니 밭농사 지으셨어요.

바로 거기 그 자리 집터며 밭이 있었던 데가 어떻게 변했을지 찾고 싶었습니다.

거기가 고흥의 명산인 '천등산'의 바로 옆 봉오리로 '딸각산'이라고 부르는 산 계곡의 첫 민가들이 있었던 곳이거든요.

 

장지에서 내려와 거기 딸각산 쪽으로 난 비좁은 농로를 타고 계곡을 오르기 시작했지요.

대략 칠팔십 미터 어쩌면 백미터쯤 오르니까 길가에 바로 외따로 떨어졌던 그 첫 번째 집이었던 친구놈 살았던 자리가 보입니다.

돌무더기가 한두 군데로 즐비하니까 여기가 집터였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또 다른 친구놈(참고로 제가 늦은 나이에 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제 시골친구들 대다수가 한해 선배들입니다.)이 이 친구 그 옛날 그곳에 살았던 그 친구 소식을 물어오기도 하고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중학교까지 함께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서로 달랐거든요.

매주 토요일마다 마을 회관을 빌려서 열었던 '멸공소년단' 반상회 쪽에서도 얼굴 한번 못 봤기에 저로선 그 책무를 맡은 처지라서 매우 곤란했었는데 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턴 더더욱이 얼굴 볼 일이 없어지고 말았답니다.

 

요즘으로 치면 '특목고'내지는 '특성화고'의 원조가 어쩌면 이런 학교 들[금오공고(구미), 금파공고(광주), 전북기계공고(익산) 등등]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다 보니까 금파공고로 갔던 저와는 달리 뛰어난 수재였던 그 친구 금오공고로 갔던 친구입니다.

그러고는 이별입니다. 어쩌다가 한두 번은 마주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기억도 없으니까 제 기억은 그걸로 이별입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나누던 덕담 중에 그 이야기가 들었습니다.

금오공고를 마치고 육사에 들어갔다네요.

그리고는 육사 생도로서 그 시점에서 어느 날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녀석도 잘 모르겠는데 그 언젠가 그 친구 아주 맹한 자세로 고향에 하필이면 자기네 집에 들렀는데 그리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사실 그것도 전해 들었을 뿐이라는 거…

아무튼, 산골에 살았던 제 친구가 한때는 그래도 육사 생도였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 공부하는 거 말고는 다른 세계의 그 어떤 것과도 연관이 없어 보였던 그 친구 -

'그 친구 어쩌다가 그렇게 돼버렸을까?'

덩그러니 놓인 호박덩이를 보면서 그 친구 생각에 잠시나마 가슴이 저몄습니다.

'친구야~ 내 친구야. 살아서 만나자~'

 

01

고향 땅 순례기 - 01

 

눈앞으로는 딸각산 바윗돌이 치솟았고 왼쪽의 작은 등성이 사이론 천등산의 봉우리 하나도 들어왔네요.

저기 비닐하우스 쳐진 쪽이 아닌 그 왼쪽 가장자리 어디쯤 삼각 구도로 우리 살던 세 집이 있었을 텐데…

하면서 올라갔지요.

02

고향 땅 순례기 - 02

 

드디어 우리 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눈앞의 밭둑을 보았습니다.

그 밭둑 계단으로 깎아서 건조대를 만들고는 건조대마다 바닷가에서 뜯어온 계단 김 두 줄로 말렸던 15도에서 60도쯤의 경사였던 그곳이 깡그리 사라지고 안 보입니다.

그 밭둑에 구덩이들 파고는 호박도 심었고 물 외(오이 닮은 외)도 심어 풀숲에서 팔뚝만 했던 거 따내기도 했던 그 밭둑이었었는데…

그 초지에 아름드리 소나무까지 들어섰다는 것 도저히 못 믿겠데요.

집에서 밭으로 오르자면 마당을 지나 작은 개울이 흘렀었고 그 개울 너머로 저기 밭둑이 자리했었거든요.

그 길로 올라서 드넓었던 그 밭(족히 이천 평은 됐을 거라고 어머니 말씀하셨습니다.)에도 들어가서 보고 싶기도 했었는데 그 초입에서부터 발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03

고향 땅 순례기 - 03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딸각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답니다.

저기 저 딸각산의 급격한 경사가 살짝 완만해졌던 그곳에는 말 그대로 원시 논이라고도 불릴만한 다랑논이 몇 개 있었습니다.

다섯 평 열 평 스무 평쯤 됐음 직한 아주 작은 논들이 말입니다.

어르신들 그곳에서 모내기하실 적에 우린 거대한 바위와 돌로 둘러쳐진 거기 그 논둑 사이를 헤쳐 다니면서 볼기짝이며 아가리가 붉은 칠로 범벅이었답니다.

산딸기 푸짐하게 털어 넣고 모아 넣고 긁어 넣었던 그 시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 것들 추억하면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그 산길을 따라 오르는데 주변이 온통 잡초에 잡목으로 둘러쳐졌습니다.

04

고향 땅 순례기 - 04

 

그러는 중에도 배경 좋은 곳 골라서 인증삿도 박아두고는 살짝 더 오릅니다.

05

고향 땅 순례기 - 05

 

그러나 그것도 몇 발짝 못 가서 더는 안 되겠더라고요.

길처럼 보이는 흔적도 없이 앞뒤로 쭉 터널처럼 길게 뚫려서 밟히는 풀마다 물기가 촉촉하지 어느 순간에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도 같았지…

은근히 겁도 나는 겁니다.

'이쯤이면 장지에서도 사오십 분 거리는 더 들어온 오지인데 이거 어떡하나…'

마지막으로 길 없는 곳 그 정점에 서서 인증삿 날리고는 돌아오기로 맘먹었지요.

06

고향 땅 순례기 - 06

 

내려오면서는 아까 무작정 특별한 뜻도 모호하게 올랐던 그때와는 달리 집터며 밭이었음 직한 자리 더 세심하게 살필 여력이 생기더라고요.

집터가 있었을 거로 추정되는 곳에서도 아까의 개울 쪽 방향이 아닌 뒤꼍 쪽으로 추정되는 반반한 곳을 지나면서 내려다봤습니다.

집터(초가삼간에는 방이 하나 있었고 부엌과 마구간이 각각 있었으며 담장 안팎으로 마당이 있었을 만큼 넓었으니까)로 인정할 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소담하게 자란 풀숲이 있어 아마 집터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동질감을 전해 줍니다.

 

07

고향 땅 순례기 - 07

 

그 집터 바로 곁으로는 초현대식 설비(쇠기둥에 쇠파이프와 그물 장비로 주위를 둘러싼 방책선)가 보입니다.

아랫마을의 우리 집터 바로 밑 자리엔 또 다른 친척이 바다와 축대로 담을 쌓고 사는 두세 다리 건너 가까운 친척

이 들어와 살았었고 지금도 살고 있거든요.

거기에 젊은 동생들이 객지에 나가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살았답니다.

게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먼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거나 했었는데 지구 온난화 탓인지 새만금이나 영산강 방조제와 같은 대규모의 해류 차단 시설물 탓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나도 어획량이 적어서 고심하던 차 마을 산간벽지의 공터에 수익성 특용작물을 키워보기로 했다 합니다.

 

그것이 '블루베리'라는 작목인데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오늘 네이버(참고로 맨 아래에 그 과정 일부가 있음.)에서 찾느라고 한참이나 헤맸거든요.

그 블루베리라는 걸 키우기로 하고 작업해왔는데 아버님께선 어느 날 갑자기 큰 병을 얻어 떠나가시고 지금은 동생들이 돌본다는 그 블루베리 양목장입니다.

검색하면서 보니까 이게 농산물이 아니고 어쩌면 임산물일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둘러친 것은 멧돼지가 들어오는 걸 막으려고 그런데요.

저기 방책 울타리 너머로 개울이 있고 잡초 우거지 그곳이 밭둑이며 그 위로 잡목 널브러진 거기가 바로 밭이었답니다.

 

08

고향 땅 순례기 - 08

 

블루베리라는 그 나무 화분마다 한 주씩 심어서 키우고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09

고향 땅 순례기 - 09

 

이 나무들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건너편으로 그토록 올라가고 싶었던 밭이며 왼편으로는 딸각산이 선명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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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순례기 - 10

 

고향 땅 순례기 - 11

 

그리고 내려오면서 보니까 들판의 논이고 밭이고 그 절반은 이미 아무도 경작하지 않는 논밭으로 묵었습니다.

그것 중 어느 묵은 밭입니다.

누군가가 소 여물이라도 주려고 심었을 법한 호박에서 덩이 몇 개가 열려 풀숲에 숨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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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순례기 - 12

 

제 나면서부터 아홉 살 초입까지 살았던 성지(?) 순례를 마치고 드디어 장지로 돌아왔습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곳곳에서 고향 사람 반가운 면면을 만나 얼싸안기도 하고 덥석 손잡기도 하고 그랬는데 장지 그곳에도 반가운 면면이 여럿입니다.

예전 같잖게 요즘은 유자와 같은 특용작물을 갖고 살기는 매우 어려워졌다는 이야기, 새 살길이 어딨을까 난감하다는 이야기, 최소한 20년을 내다보면서 시작한다는 젊은 친구의 이야기, 당장 죽게 생겼는데 어떡하느냐는 이야기…

그런저런 이야기들이 오랜 세월 노동현장에서 떨어져 살아왔던 저로서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새롭게 꾸며가는 또 다른 동생한테 어쭙잖게 나불대다가 그 이야기들 수준이 제가 꿈꾸고 바랐던 망망한 이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당장 현실이란 걸 깨닫고는 정말이지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여럿이 이야기하는 중에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답니다.

문득 객지에서 온 친구들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지요.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올라가나?'

밖에서 들어온 친구들 대다수가 서울 쪽에서 내려온 얘들이거든요.

멀리는 아니어도 고흥에 터미널까지만이라도 꼽사리 껴서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해서 전화를 넣었더니 걔들은 벌써 맨 아래쪽 찾길 바다 쪽에 난 친구 집에 모여서 떠날 준비 하는 거더라고요.

나만 홀로 때놓고 가겠다는 친구놈의 농담도 농담이지만, 거기 산중 밭(장지)에서 친구 집까진 제가 아무리 서둘러서 내려간다고 해도 반 시간은 걸릴 거리였기에 부리나케 서둘렀답니다.

 

장지의 어르신이나 아직 남은 가족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는 부지런히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내려오는 중에도 마을 이웃 네댓이나 더 만나면서 정담 나누고 내려왔지요.

 

마침내 친구 집에 도착했더니 마침 그 많은 쪽수가 한데 모여서 밥 먹는 중입니다.

난데없이 시아주버니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그 형수님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그 급한 중에도 시골에서 꺼낼 수 있는 모든 좋은 음식 다 갖춰서 차려 냈더라고요.

각종 나물에 그 싱싱한 '전어회'까지…

 

아니라도 자꾸만 손사래를 쳤는데도 저에게는 따로 무언가를 듬뿍 담았네요.

우리 혈연으로 맺어진 것도 또 다른 늘 볼만한 그렇다고 서로의 전화번호만이라도 모르는 사이이건만 오로지 과거에 서로 이웃집이었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마침 무슨 일로 다 어디론가 나갔기에 얼마 되지도 않는다면서 자루에 가득 마늘을 담았답니다.

저는 그 고마움도 제대로 못 전한 채 얼렁뚱땅 친구놈 차에 타고 말았습니다.

 

다 큰 놈들이 다섯이나 되니까 승용차가 미어터질 지경이데요.

그렇게 삼사십 분을 달려서 고흥터미널까지 들어왔는데 옆자리의 친구놈이 부리나케 내리더니 터미널로 들어가는 겁니다.

저는 녀석이 뭐할지를 뻔히 알겠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만두게 하려고 부리나케 따라붙으면서 지갑에서 차비까지 꺼내면서 도착했더니 녀석 이미 표를 끊었습니다.

제가 터미널에 들어선 순간 이미 광주로 가는 시외버스가 출발하더라고요.

녀석도 표를 사 들고 나오면서 그걸 봤습니다.

 

녀석이 부리나케 제 손을 잡아끌더니 터미널 정면 쪽으로 이끕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나오는 고속버스를 잡아 세우네요.

흐흐흐…

그렇게 해서 녀석과 헤어졌고요.

다른 친구놈들하고는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헤어졌지요.

차표 끊어준 그 친구 목수로 싸돌아 다닌 지가 장장 이십 년도 넘었다네요.

주로 야간에만 일한다니까 녀석 혹시 그 탓에라도 몹쓸 병 걸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녀석도 그렇게 다른 친구들도 무사히 올라가길 빌면서 버스에 자리하고 앉았었는데 그 큰 버스가 텅텅 비었습니다.

 

운전사 1, 손님 1

이렇게 큰 차에 나 홀로 오르기는 난생처음이었거든요.

저간의 사정을 대충 들먹이고는 운전석 바로 옆자리인 맨 앞으로 옮겼답니다.

올라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차가 멈출 일이 있었는데 기사님 차 안을 둘러보더니 뒤쪽에서 제 차표 들고 옵니다.

'허허^ 이거 없으면 차비 물어야 합니다. 흐흐~'

'아차^ 깜빡 거기 놓고 와버렸네요. 후후~'

 

어느결에 잠들었던지 깨어나 보니 손님도 몇 사람 더 늘었고요, 어느덧 거기가 화순입니다.

'앗싸 좋아~'

지금보다 훨씬 교통이 안 좋았던 고등학교 시절(80년대 초)에도 그랬고요, 나중에 먼 거리로 일 다녔을 때(90년대 초중반)도 오랫동안 차를 탔을 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었다가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처음엔 멀미해서 그랬었지만, 나중엔 멀미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 지루해서 그랬답니다.

 

어쨌든지 수월하게 고흥에서 광주까지 들어왔지요.

대신 너무도 오랜 시간 앉아만 있었기에 무릎이 몹시 아팠습니다.

터미널에 내려서는 그 자리가 아닐 것으로 짐작은 하면서도 절룩거리며 시내버스 여럿이 서는 데로 다가갔지요.

이정표에 그려진 정류장 화살표를 따라가 보니 역시나 건너편을 건너가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이리저리 건널목을 찾아 헤메다가 다시 터미널에서 막 도로 쪽으로 나오는 지점으로 돌아갔답니다.

그곳에 지하 건널목 내려가는 입구가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사이 아팠던 무릎도 자연스레 치료되었네요.

올라와서는 즉시 지갑을 뒤져 차비를 찾았는데 하필이면 만 원짜리 뿐입니다.

'읔! 고흥에서 친구놈이 차표만 안 끊어줬어도 잔돈이 생겼을 텐데…'

마침 첨단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들어옵니다.

만 원짜리로 계산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거니 생각해서 일부러 맨 나중에 올랐답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가진 것이 하필이면 만 원짜리 뿐이라서…'

'어^ 안 됩니다! 만 원짜리로는 안 됩니다!!!'

'이것뿐인데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요. 가서 바꿔와서 타야지요!'

 

그 길로 내려왔지요.

그리고는 이리저리 살폈더니 거기 정류장 바로 앞에 슈퍼마켓을 닮은 가게가 보이네요

들어가면서 입구 현관문 옆으로 '교통카드'라는 글귀도 만났었고요.

 

주인아저씨가 다가서자 그런저런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는 아까 그 만 원짜리 내놓으면서 교통카드 가장 싼 걸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천 원짜린데 그걸 충전해야지 쓴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교통카드를 자주 쓸 일이 있느냐고 또 묻습니다.

꼭 그럴 일은 없지만, 언젠가는 쓰지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그 아저씨 그러지 말고 낱돈으로 가져가라면서 오천 원짜리와 천 원짜리로 바꿔서 건넸지요.

이런 경우를 뭐라고 불러야 정답일까요?

네 감동! 감동!!! 그 자체였지요.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젊은 아저씨한테 뭐라도 갚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드디어 적당하겠다 싶은 과자 한 봉지를 들었답니다.

'다 좋지만 제 몸으로 바깥에 나오기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다 큰 놈이 이렇게 과자 봉지나 들고 나다니면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실은 그렇게 해서라도 창피한 걸 만끽하고자 이걸 사는 겁니다.'

저 사실 심리적으로는 자주 접하지만, 물리적으로 창피를 사본 경험이 매우 드물거든요.

외부활동이 전혀 없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요.

부러 창피를 사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뜻하지 않게 창피를 산다면 그 얼마나 값진 선물이 됐겠습니까?

13

고향 땅 순례기 - 13

 

바깥 일은 그야말로 예상할 수 없는 일이더라고요.

그렇게 버스에 올랐는데 첨단 쪽으로 가는 버스이기에 한가할 걸로 예상했던 저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콩나물에서도 그런 콩나물은 없을 겁니다.

너무나도 꽉 찼기에 발밑을 내려다볼 수도 없을 만큼 비좁았지요.

 

왼손 온전히 버스 손잡이 막대를 잡았고 오른손도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이 과자 봉지를 쥐고 있다는 걸 빼고는 온전히 손잡이 막대에 있었지만, 너무도 불안합니다.

아래쪽 발 간격이라도 어깨너비로 벌어졌다면 그나마 여유로웠을 텐데…

완전히 죽을 맛이었습니다.

전날 고흥에 내려갈 때부터 시작해서 여태 쏟은 그 모든 힘보다는 그 순간에 쏟아야 했던 힘이 더 컸을 겁니다.

오랜 시간도 아니고 많이도 아니고 달랑 한 정거장을 지나는 시각을…

 

그 힘든 중에 문득 제가 입고 있는 재켓의 구조에 정신이 쏠렸습니다.

'그래 여기엔 모자가 있었잖아!!!'

그 순간에 손잡이 막대 잡은 손에 온통 힘을 주고는 과자 잡은 손을 머리 뒤쪽으로 넘기고는 조심스럽게 더듬어서 모자 속이 될만한 지점에 과자 봉지 놓았답니다.

그러고는 살짝 한 번 더 더듬어 보고는 얼른 버스 손잡이로 대상을 옮겼지요.

 

'푸푸^^^'

제가 생각해도 우습습니다.

다 큰 놈이 모자 속으로 과자를 담아 버스에 선 꼴이라니…

그렇게 복잡했던 콩나물도 한 정거장을 지나니 숨통이 트여서 어깨너비보다 더 넓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더니 두 정거장에 이르자 아예 뒤쪽으로 건너갈 수도 있을 만큼 한가해졌지요.

그리고 세 정거장을 통과하니까 그토록 빽빽했던 콩나물 다 말라 비틀어졌던지 오간대도 없이 인제는 앉은자리까지 생겨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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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순례기 - 14

 

그리고 드디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팠던 무릎도 완전히 나아있고요.

내내 모자 쪽으로는 손도 안 댔던 것이 아파트에 들어와서는 큰 거울에 대고 과자 봉지 얹은 저의 뒤통수를 보고 싶었는데 그 마지막에 저의 열망 물거품이 돼버렸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현관에 들어서서는 신고 내려갔던 신발 주어서 신발장에 놓으려고 막 엎드리는 순간^

'철퍼덕' 발아래로 그것이 떨어지는 겁니다.

'아차 차차 이런 나의 실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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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순례기 - 15

 

이 장갑이 고흥의 고향 땅 장례식 장지에 들렀다는 그 마지막 인증삿입니다.

저걸로 했던 일이 비록 그것도 관 내릴 때 어렵사리 겨우 꼽사리 낀 거에 불과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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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순례기 - 16

 

불루콜리

부루콜리

브로콜리

부르벨리

불루베리

부루벨리

농촌진흥청

농촌진흥원

한국농촌진흥원

블루베리

 

여기 검색 단어에 '블루베리'가 두 번이나 있는 까닭은 그 정확한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섭니다.

이렇게 써 두면 제 말뜻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겁니다.

- Blueberry -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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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순례기 - 17

출처: 검색엔진 네이버검색

 

 

 

Posted by 류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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