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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3.18 장례식 날 마음 싱숭생숭하니 되려 추억이 더 솟구치데요.

장례식 날 마음 싱숭생숭하니 되려 추억이 더 솟구치데요.

 

제가 살았던 시골에서는 '잘살아 보세~'의 6~7십년대에 온 신세대 건아였음에도 고등학교까진 꿈도 못 꾸고 겨우 초등학교나 중학을 마친 뒤 곧바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난 축이 많았습니다.

제 친동생이나 사촌 동생 중에도 그런 축에 들었던 면상이 상당합니다.

 

며칠 전엔 시골에 남아서 온갖 잡무를 다 보시는 사촌 형님으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사촌 형 집안(백부)이 아닌 다른 사촌(숙부) 집안의 서울에 살던 동생이 불미스럽게 죽었다는 겁니다.

 

그 친구 이제 마흔을 갓 넘겼을 터인데 이 친구도 중학을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갔던 친구입니다.

아주 어렸을 적 제가 시골에 살았을 때나 자주 봤을 친구라서 기억도 가물거렸죠.

 

형님 말씀으로는 당시 말로는 목요일 오후 2시(어제 오후 2시) 화장해서 시골 마을 회관으로 들어갈 테니 생각 있으면 와달라는 이야기였어요.

형님이 지금 서울에 올라와서 장례절차를 밟고 있는데 시신 화장을 해서 내려올 생각이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어제 내려갔지요.

저는 그래도 서울보다는 시골과의 거리가 훨씬 가까운 광주에 살기에 서울에서의 일정을 정확히 알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살짝 먼저 출발했답니다.

그 탓으로 약속한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들어가 버렸네요.

 

그 마을엔 우리 '류(柳) 씨 집안의 집성촌'이라도 되는 양 류씨가 많이 살지요.

마을 분들이 하나둘 마을 회관으로 모여듭니다.

저도 처음엔 알 듯 모를 듯한 거기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눈 뒤 서울에서 내려올 '운구차(?)'마냥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금세 지루해졌습니다.

하여 마을 앞으로 난 마을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봤지요.

 

여러 가지 상념이 겹쳐집니다.

70년대 말경에 그곳에서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지금 다음 지도에서 그 거리를 뽑아 봤더니 우리 마을에서 중학교까지의 거리가 9.1km라고 나옵니다.

요즘에 와서는 그 길이 반듯해지고 크게 넓어졌으며 거기다가 아스팔트 포장까지 되었지만, 당시엔 꼬불꼬불 울퉁불퉁 완전 흙투성이 돌멩이 시골길이었어요.

 

큰길을 오가는 버스를 탔던 애들도 더러 있었지만, 우리 마을 상당수는 저처럼 걸어 다녔지요.

저도 1~2학년 때까지는 주로 걸었었는데 3학년 때는 자전거를 많이 탔답니다.

 

9km가 넘는 거리 그 먼 거리를 매일 걸어서 다닌다고 생각해봐요.

그 길의 4분의 3은 또 산길입니다.

아이들 걸음이니까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후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돌아오려고 애썼겠지요?

저마다 그 길에서의 추억들도 엄청날 거에요.

 

저기 '별학산' 자락에도 사연이 매우 많습니다.

그때가 74년이었던지 76년이었던지 그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술(막걸리) 배달하는 트럭을 얻어탔던 어린 학생들 상당수가 저 산모퉁이를 도는 경삿길에서 차가 넘어진 바람에 허망하게 목숨을 놓아야 했답니다.

그리고 그 찾길 모퉁이 부근에는 일정 때 뚫다가 만 인공 굴도 있는데 그게 깊지도 않았지만 홀로 거기를 지날 때면 어쩐지 꺼림칙하데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일제 말이었던가 해방 후의 일이었던가 그 부근에 좌파 인사들 줄줄이 세워놓고는 총질해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했었답니다.

그때 죽였던 사람들 정상적으로 묻히지도 못하고 돌무덤을 쌓았다고도 하던데 그런 이유로 어머니는 밤길에 그곳 지날 때면 다리 후들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도 했었답니다.

 

저 역시도 겁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어떨 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구 무서움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컴컴한 밤중이라도 흙바닥이 있는 신작로에선 또 비가 억수로 쏟아지지 않는다면 길을 못 찾을 만큼 어둡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무도 없이 오로지 자기 혼자 있다는 적막감·또 자신만의 발소리·김치통끼리 부딪치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이 깊은 산길의 고요함과 어울리면 그 무서움은 걷잡을 수 없을 만치 커졌어요.

그러면 밑도 끝도 없이 크게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리고 마구 뛰었어요. 별학산 산길 초입에서 인가가 있는 마을까지 하면 대략 1~2km쯤 되겠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덜컥 겁먹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대략 수백m를 마구잡이로 뛰었겠네요.

 

그 별학산도 보이고요 이쪽으로는 제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갈 때까지 그 자락에서 살았던 '딸각산'이며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우리 봄가을 소풍의 단골 최적지 '천등산'도 보입니다.

 

~ 훗날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 01 ~

 

 

~ 훗날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 02 ~

 

그런저런 상념을 좇아 마구 걷던 중 고흥 벌판을 초록으로 발라버린 마늘밭도 만났고요, 그 마늘밭을 따라 쭉 올려다보니 그 옛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사셨던 집터 자리가 느껴집니다.

사십 년도 훨씬 넘은 오랜 옛날의 집터입니다.

막상 가보니 아무것도 모르겠데요. 집 앞뒤로 울창했던 그 큰 대밭이며 감나무들은 어디로 갔을는지…

마당 아래쪽에는 또 커다란 샘이 있어 언제든 길러 먹게끔 철철 넘쳤었는데…

제가 이런저런 상념을 헤치면서 최근까지도 광주에서 마주쳤던 초등학교 동창의 시골집 앞을 지나 동네를 빙 둘러 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 훗날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 03 ~

 

그런데 그사이에 벌써 서울에서 차가 내려왔습니다.

여기저기와 인사 나누고 또 거길 찾은 여러 조문객(주로 일가친척)들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만나기에 얼굴도 모르는 또 이름도 모르는 그분들과 일일이 인사하면서 우물쭈물하던 사이 벌써 동생의 유골함은 산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뒤따라서 부지런히 좇아갔건만 이미 땅에 묻어버렸네요.

묻었다기보다는 너무도 얕게 파낸 거로 봐서는 덮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성 부립니다.

 

할아버지 내외·작은할아버지 내외·그 밖에도 거기 모셔진 일가친척들 묘소 몇 군데를 도니까 큰절 올린 것만 해서도 도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이 저는 동생 놈 영정을 몇 번이고 보고 또 쳐다봤지요. 아무리 봐도 2~3십여 년 전의 그 예뻤던 동생 놈의 얼굴이 아닌 거에요.

산길에서는 제가 넘어지지 않고 따라가려니 그게 정말 고역입니다.

절할 때도 같은 속도로 절하지 못하고 저 홀로 절하다가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었고요. 후후후…

 

동생아! 예쁜 내 동생아. 잘 가거라. 아주 잘 가거라~

그 자리서는 원수 놈의 술 그만 까대고 세상만사 다 젖히고 맘 편히 잘 살아주라~

어제 여러 번 제사 지내는 동안 어느 한 번은 내 차례도 왔던 거 너 다 봤지?

음복주 그것도 시늉만 하고 한 방울도 묻히지 못했던 거 너 다 봤지?

언제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술 멀리해라!

형 거기 들어가거든 날이면 날마다 우리 말 술로 퍼 보세! 어여쁜 내 동생아~

 

 

Posted by 류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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