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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9 아주 먼 옛날의 그 향기로움을 찾아서… 1

아주 먼 옛날의 그 향기로움을 찾아서…

 

제가 사는 여기 광주에 또는 거기가 전국일지라도 이 글의 태그로 썼던 이런 이야기(광노협, 백형기, 전노협, 한노당, 진정추) 들어본 분들도 있을 테고 더러는 아니, 대다수는 난생처음 듣는 아주 낯선 단어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시기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중반에 우리 정가 특히 우리의 민중한테는 거대한 흐름 중 하나였고 또 큰 반향을 불렀을 말들이기도 했습니다.

'이재오·김문수·이부영'등등의 오늘날엔 걸출한 면면도 당시엔 '민중'이라는 대단한 이름표 붙이고 있었기에 저를 비롯한 누구도 그 나중을 의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저런 일체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제게 버팀목 돼주셨고 디딤돌 돼주셨던 '백형기동지'였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제가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동안 불의의 사고로 그분 영영 떠나시고 만 겁니다.

 

저는 몸이 반 토막 되어 세상 물정 모르고 간신히 연명하는 동안 그분의 뜻을 추모하려는 움직임이 그 시절의 벗들로부터 이어졌었나 봅니다.

나중에 저도 연락이 닿아 한 해에 한 번 있었던 그 추도식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어느 해부터는 그도 떨어지더니 올해는 웬일로 문자가 들어왔네요.

 

그 문자를 보자마자 반가움이 먼저 들었는데 막상 당일이 내일로 닥쳐오자 미묘한 갈등이 일었습니다.

'여기를 가? 말아? 혹시 4.13 총선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 거 아니야! 그렇다고 너무나 오래간만에 연락이 왔는데 모른 채 팽개쳐서 쓰나! 에라 모르겠다. 정면으로 맞붙자!!!'

 

실지로는 한참이나 망설였는데 정작 결정한 시각이 출발할 날짜인 어제 새벽이 다 되섭니다.

목적지(동지의 장지)가 보성(전남)에 있으니까 광주에서 꽤 멀거든요. 그런 까닭에서도 여럿이 함께 동시에 출발함이 산뜻한 거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광주 오른쪽 끝자락에서 모두 모여서 출발하기로 했데요.

 

제게 문자로 들어온 내용에도 그 지점이 박혔거든요.

얼른 '다음 지도'를 펼치고는 그 지역(광주 - 삼영예식장)을 검색해서 교통 편을 살폈지요.

시내버스가 한 노선으로 대번에 들어갈 수는 없고 한 차례는 갈아타고서야 가능하네요.

 

그 부분까지 그림으로 뜬 뒤 간략하게 편집해서 제 휴대폰에 담았답니다.

기억 장애도 결부한 저로서는 그 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아침에 눈을 떴더니 시각이 너무 촉박합니다.

적어도 모임 시각 한 시간 반 전에 시내버스에 올랐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이미 엎어진 물이라고 여겨 일순간에 포기하면서 아침을 뜨는 중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는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들어옵니다.

실은 거기 갈 것인지를 결정하기 직전에 그 동생한테 갈팡질팡하는 제 꼴 그 자체를 문자로 보냈던 게 있었기에 녀석으로부터 다그치는 전화가 들어온 지도 모를 일이에요.

우리 마을에 그때 그 시절의 우두머리(동네 형님)가 살고 있거든요.

그 우두머리한테 얼른 전화해서 같이 자신이 있는 데로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이제는 제가 팔자 좋게 고민할 계제도 아녔습니다.

부랴부랴 동네 형님께 전활 넣었더니 형님이 아니라 거기 어머니가 받으십니다.

의아해하면서도 이런저런 사정 이야길 했더니 형님이 어젯밤 술이 떡이 돼서 들어온 뒤 나동그라졌다네요.

제가 아무리 사정해도 막무가내십니다. 대신 제 어머니를 자꾸 찾네요.

하는 수 없이 바꾸어 줬더니 물고기 가뭄에 물 만난 듯 두 분 수다가 끝이 없습니다.

실은 두 분도 우리 사는 것 인연이 돼서 친구가 됐으니까요.

 

어차피 글렀다고 생각해서 다시 연락 온 동생한테 전화했더니 저 혼자라도 자기들 있는 데로 빨리 오랍니다.

이렇게도 바빠 죽겠는데 길거리 택시는 어찌 그리도 한산합니까? 한산하다 못해서 택시라는 종이 멸종한 듯싶더라고요.

5분 10분이 지나는 동안 어쩌다가 한두 개를 보긴 봤는데 빈 차가 아니었던지 쳐다보지도 않고 마구 지나갑니다.

저는 눈이 나쁘니까 택시 위에 달린 경보등을 제대로 못 보거든요. 날이 궂으면 특히 그래요.

 

어떻게 하다가 드디어 빈 차를 만났습니다. 어찌나 고마웠는지요.

목적지에 다다르니 6,800원이 나옵니다. 거스름돈 받지 않기로 하고 칠천 원을 줘버리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천 원짜리가 부족합니다.

하는 수 없이 만 원짜리로 건네고는 삼천 원을 거슬려 받았지요. 그렇게 기사님을 막 보내려는 순간 택시 기다리면서 애탔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지요.

얼른 기사를 다시 부르고는 천 원짜리 한 장을 더 건넸답니다.

 

이렇게 해서 작은 일행이 만나 큰 일행을 찾아간 거에요. 그러고는 그 일행과 함께 보성으로 내려갈 전체와 합류했지요.

그 순간의 제 모습 어땠을까요?

 

아침에 세수도 제대로 못 했지 얼렁뚱땅 아침 때우고 이라도 닦고 나가려는데 칫솔이 또 똑딱 부러졌지요.

그래서 지금은 이혼하고 없지만, 8~9년 전 아내가 집 떠나기 직전에 썼기에 아직도 세면대 앞 큰 거울에 함께 걸린 아내 칫솔을 제 칫솔인 양 급한 김에 빼내 썼답니다.

그런 상태로 언제 거울이나 봤겠어요. 두툼한 겨울 외투에 겨울 바지 거기다가 여태 자다가 인제 막 일어난 듯한 머리 꼴은 또 얼마나 산만했겠어요?

 

그렇다고 평소 제가 그보다 훨씬 낫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저는 누구나 생긴 대로 사는 것이 바르고 생각하는 묘한 종자니까요.

그렇지만, 어제 아침은 해도 너무했지요. 어떤 친구는 한두 해전에 봤겠지만, 그 밖으론 대다수가 5년 10년 심지어는 스무 해도 넘어서 만날 친구들일 텐데 말입니다.

 

정확히 세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서른 명 남짓으로 보입니다.

세 등분으로 나눠서 한 등분은 두셋이 많은 형 들이고 또 한 등분은 두셋이 적을 동생들 그리고 그 나머지가 저와 같은 63년 토끼띠지요(여기에 혹시 나잇살 속인 놈이 들었다면 그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제가 집 떠나기 전 맘 먹었던 나부랭이들 그야말로 김칫국이었습니다.

추도식 올 20주기를 봉분에서 치르는 마지막 추도식이 될 거랍니다.

나중부터는 가족들이 결정하는 평장 묘에서 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의 그거가 될 거라며 그간의 진행 상황을 그 추도식 도중에 알려주네요.

아마 그 탓에 한참이나 연락이 없었는데 요번에 연락 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산자엔 버팀목 미래한테는 디딤돌 - 01 ~

 

 

~ 산자엔 버팀목 미래한테는 디딤돌 - 02 ~

 

 

~ 산자엔 버팀목 미래한테는 디딤돌 - 03 ~

 

추도식을 마치고 모두가 내려와 가볍게 점심 나눈 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여성동지들과 남자들이 따로국밥 하기로 한 것입니다.

남자들 당구장에서 죽쳤는데 여자들은 모두 광주로 올라갔다고 나중에는 전합니다.

어쨌든 저는 당구를 칠 수도 없는 몸이라서 무척 답답하데요.

 

그래서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나와서 걸어 다녔지요.

보성읍 전체를 마치 새로 고치는 거처럼 보였습니다.

깔끔한 건물이 들어찬 시가지를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 물대포 맞았던 그 양반 보성 사람이었어!!!'

 

~ 산자엔 버팀목 미래한테는 디딤돌 - 04 ~

 

 

~ 산자엔 버팀목 미래한테는 디딤돌 - 05 ~

 

올라오는 길은 그러잖아도 대낮부터 내렸던 비가 더욱 드세지데요.

컴컴한 길 더듬어 오느라고 운전한 동지가 운전하느라 애 좀 먹었을 성싶데요.

광주에 와서는 친구놈이 부르더니 싫다는 데도 기어이 제 주머니에 뭔가를 쑤셔 넣습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가면서 차비나 해~'

 

못 이긴 채 받긴 받았지만, 친구(백형기 동지의 친동생)놈이 참 고맙습니다.

 

 

Posted by 류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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