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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하거나 못하지만, 밉거나 싫지 않고 좋아 죽는 것이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목적하는 바가 있어 일부러 그런 상황을 꾸밀 수도 있겠지요.

 

저는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술을 안 먹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어요.

저도 이런 제가 '자기모순'이고 심하게 말하면 '표리부동'인데 그 어떤 채찍질이 온대도 견뎌보려고요.

 

이 글 제목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안 하거나 못하지만, 밉거나 싫지 않고 좋아 죽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구성원 일만 이천도 훨씬 더 되는 '혼술남녀 최고의 사랑~'이란 밴드의 구성원인데 거긴 요즘처럼 스산한 세풍에도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글이 올라오는 곳입니다.

https://band.us/band/61195357

 

여태 가입만 하고 아무것도 안 했기에 괜스레 송구스러워(?)서 짧게 몇 줄 쓴 게 전부지만, 나는 여기가 참 좋습니다.

 

그것 말고도 몸이 따라주지 않거나 세태와는 맞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 텔레비전 같은 거에서 구경이나 저 홀로 상상만이라도 좋은 것들이 많아요.

 

가령 애들이 굴렁쇠 굴리고 달리는 것! 연 날리는 것! 딱지치기! 팽이 치는 것! 그런 것들이 그것입니다.

다 해봤으니까요.

 

시골에서 집집이 물 안 나오던 시절엔 주로 아주머니나 처녀들이 밑 빠지지 않게끔 밑동에 굴렁쇠 단단히 박힌 물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출렁이지 않게끔 바가지를 올리고는 이고 다녔었어요.

그 물동이가 헐어서 구멍이 나거나 하면 물동이 구실을 못 하니까 개구쟁이 꼬맹이들 그 굴렁쇠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요?

 

문 종이(한지)로 연(우린 참 연으로 불렀는데 방패를 닮은 방패연)을 만들면 좋았겠지만, 그건 구하기도 어렵고 해서 주로 비료 포대나 시멘트 포대로 썼던 횟종이(시멘트 재료에 석회가 들어갔기에 예전에 시멘트를 회로 불렀으며 그 포대 역시도 횟종이로 불렀지요)를 넓게 오려서 가오리연을 만들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하늘 높이 연을 띄우면 포물선으로 길게 늘어진 연줄이 무거워서 얼레를 못 감았어요.

어쩔 땐 오르고 올랐던 연이 결국은 연줄을 끊고 멀리멀리 날아가 회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답니다.

 

모든 나무엔 그 나이테 중심엔 나뭇결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심지가 있어요.

그 심지가 작거나 단단해야 팽이를 깎아 돌려보면 곧바로 서고 오래 돌지요.

그것 깎으면서도 낫잡는 게 서툴러 피가 낭자하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쑥을 뜯어서 아작아작 씹은 뒤 바르면 그걸로 끝이었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안 보였듯이 쑥도 겨울철엔 안 보였습니다.

그러면 천상 고운 흙이나 부뚜막의 재로 베인 자리 덮어서 지혈하고 했었습니다.

 

또 바다에서 김 생산할 때 쓰는 준비물 만드는 것도 그립네요.

젖은 김을 말리는 데 쓰는 '발장'을 만들려면 그 재료로 '띠'라는 풀을 썼습니다.

산으로 들로 그 풀을 찾아 헤매노라면 때때로 뱀과도 마주쳐야 하고 그보다는 벌집을 잘못 건드려서 된통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그것 띠 오백 개 천개를 떠다가 말려서 자른 뒤 발장을 쳐도 스무 장 서른 장도 안 나옵니다.

 

최소한 발장을 백 장은 쳐야 김 한 톳(김은 백 장 묶음이 한 톳입니다) 분량이 됐을 땐데 아무리 적게 김을 수확한대도 하루에 스무 톳 서른 톳을 했던 상황인데 그걸 다 맞추려면 해마다 얼마나 그 고생 많았었는지…

그것 띠를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그걸 발장으로 치는 것도 그렇고 말리기 위해 '건장'이라는 건조장 준비하고 세우는 것도 그렇고…

그럴 뿐만이 아니라 출렁이는 손발이 시려서 깨지는 그 겨울에 바다에서 김 양식을 준비하고 수확하고 마지막엔 육지에서 준비하고 설치했던 것 철거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바다 쪽으로도 깨끗이 철거해야 다음 해에 불편 없이 다시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그것들도 그렇고…

 

그 모든 일에 연로하거나 손길이 미숙한 자가 해내기엔 절대로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그런 순간에 자기 일도 바쁜데 일부러 시간 내서 주변을 살피고 도왔던 분들…

그 수많은 분, 그러니까 '먼 친척보다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달리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옛날 촌에서도 오늘날의 도시에서도 저는 수많은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났네요.

 

오토바이 사고로 길가에 나뒹굴며 의식을 잃었을 때도, 어느 골목에서 쌓인 눈에 덮여서 의식이 없을 때도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병원에 실어다 줬으며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119 신고해서 병원으로 갔다는데 저는 지금까지도 둘 모두의 기억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오늘날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생명을 부지함에도 저는 매 순간을 잊어버리니 저도 참 나쁘지요.

 

그러함에도 좋은 건 여전히 좋습니다.

그 좋은 것들 모두가 제 삶의 발전소며 충전기였지 않을까도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제가 알든 모르든 극히 일부(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놈들, 나라 안이 됐든 나라 밖이 됐든 역사를 바로 보지 않고 왜곡하는 놈들, 악행으로 사익을 취하는 놈들 등 죽어도 싼 놈들)를 빼고는 모두 모두 코로나 습격으로부터 벗어났으면 합니다.

 

 

Posted by 류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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