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숭어 잡는 영상을 보고 있자니 먼저 가신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전라남도 고흥의 한 시골 마을에서도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자락의 산골짜기에서 오막살이를 했었다.
그런 산중에 살았기에 그 산중에서 오막살이 했던 달랑 네 가구의 우리 또래는 한 놈(걔는 여덟에)을 빼고는 모두가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도 됐을 아홉 살이 돼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갔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셋은 친구였다.
그렇게 뒤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우리처럼 때늦은 동무들이 몇 명은 더 있었는데 우리 셋을 뺀 모두는 입학하자마자 며칠 상간으로 곧바로 상급 학년(2학년)에 전급해 버리더라.
아마도 우린 도로도 없는 산길 타고서 등하교하는 게 안 돼 보였던지 우리 셋은 그대로 머물렀었다.
그런 산중에서도 우리 집은 유일하게 '김 양식'을 했었다.
말이 '김 양식'이지 그 규모가 너무나도 작았기에 아랫마을 사람들처럼 실제로 규모 있게 김 생산하는 분들에겐 명함도 못 내밀 규모였다.
그것도 동력이라곤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도마와 칼을 이용해서 '김 가공'을 하려니 그건 마치 어린아이들 소꿉놀이로 보였으리라.
지금에 와서 비유하자면 그 일은 '호미'를 들고서 '산중에 도로를 내고 그 도로에 아스팔트를 까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리라!
우리 부모님 그 상황에서는 자식 교육은 고사하고 생계를 연명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던지 그 산중에서 내려와 아랫마을에서 살기로 했었다.
그때가 1971년 초였는지 중반이었는지 지금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산중에서 학교 나다녔던 시절을 접고서 아랫마을 그중에서도 가장 바닷가로 이사한 그런 집에서 학교에 나다니게 됐었다.
그렇게 바닷가로 나와서는 '김 양식' 규모도 조금 더 키웠고 어찌어찌하다 보니까 아주 작은 목선도 하나 생겨서 인제는 산중에서처럼 남의 배에 얹혀서 어로 작업하지 않아도 됐을 터다.
우리 집에 배가 있었기에 나 역시도 아주 일지 감치부터 노 젓는 걸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어쩌면 그건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3학년이 됐을 1973년도부터 우리 아버지 슬슬 몸이 아파서 눕기 시작했는데 어떨 때는 누워계시는 아버지 대신에 내가 연안에 깔아둔 '통발'이나 '그물'을 들춰서 '게'나 주로 '잡어'였지만, '고기잡이'를 해야 했었다.
그렇게 누워버린 우리 아버지 3년을 내리 눕더니 끝내는 멀찌감치 떠나셨다(1976년).
집이라고 해봐야 바닷가 '공유수면'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과 같은 것이었기에 재산에 들 수도 없었고 밭이라야 아버지 어머니 신혼 초에 남의 야산을 개간해서 만든 세를 내어 쓰는 밭이 전부였던 우리!
3년을 내리 앓아누웠으니 그 병시중이며 약값은 또 얼마나 들었을까?
어떡해서든 살려보자고 아는 사람 모두에게 냈던 그 빚은 또 얼마나 됐을까?
아직 삼십 대에 있었던 우리 어머니!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중학교'에 보냈다.
요즘이야 의무교육으로 초·중생이 등록금 없이 무료로 다니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도 '납부금·육성회비'라고 불렀던 등록금 내고서 다녀야 했었다.
아~ 우리 어머니 그 심정 오죽했을까?
그 젊은 나이에 몸과 마음 얼마나 상했었을까?
그 시절도 나는 불효자였지만, 지금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망나니 불효자다.
중학교를 넘어 고등학교까지 보냈는데-
그 없는 살림에 거기까지 보낼 땐 우리 어머니 오죽 못 먹고 - 못 입고 - 편히 잠 못 들고 죽을힘 다 바쳐서 죽자 살자 사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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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생각하다가 어만 길로 샜네^!^
그때가 1971년도인지 그다음 해인지 어쩌면 그 다음다음 해일 수도 있겠고-
우리 아버지 생전에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우리 아버지 그날은 낚시채비를 해서 나더라 함께 가자고 했다.
그 바닷가에서 '김 양식'에 '김 가공'하려면 아주 가느다란 ‘쪽 대’에서부터 굵은 ‘통대나무’까지 대나무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또 '게를 잡는 통발을 만들 때'도 그 당시는 요즘과 달리 그 통발을 지탱해줄 거치대가 필요했기에 길쭉한 통대나무를 충분히 사 와서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서 그것에 필요한 기구를 만들곤 했었다.
지금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용도로 준비한 통대나무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4, 5미터쯤 되는 통대나무 끝에 낚싯줄을 묶고서 바닷가의 갯바위로 가자는 거였다.
바닷물이 늘 깨끗한 건 아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맑았다.
아마도 바다에서 낚시해 본분이라면 누구라도 그 사실을 알 거다.
숭어나 전어 꽁치처럼 등 푸른 물고기는 바다의 아래쪽에 사는 게 아니라 위쪽에 산다는 걸 말이다.
그랬기에 아주 가끔은 그 바다에 전어도 뛰고 숭어도 껑충껑충 뛴다.
그런 시점에 전어 몰이해서 잡아들이면 이건 '만선'이 아니라 '망조'라고 불러야 옳았으리라!
여기저기서 너무나도 많이 잡히니까 어디를 내놔도 제값을 못 받는 거였다.
낚싯대를 메고 갔던 그 날은 전어는 안 보였어도 바위에 올라서서 보니 숭어는 가끔 보였다.
그 맑은 물가에 갯바위 주위로 휘휘 휘어 다니는 숭어를 봤었다.
그러니 통대나무로 만든 낚싯대 끝에 낚싯줄 걸고 미끼를 단 그것을 계속해서 숭어한테 내밀어도 요 녀석 입도 뻥긋 안 하고 피하기 일쑤였었다.
그렇게 5분, 10분, 30분 한 시간--
'뜨랏!'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힘차게 챈 낚싯줄에 그놈 숭어가 걸려들었다.
아버지 기합 소리와 함께 그놈 통통한 숭어가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며 바윗돌 위로 떨어졌다.
그 시절에 무슨 도구가 따로 있지도 않았기에 단박에 두 손으로 덮치고서 낚아채서 들고 오려고 했으리라!
그러나 우리 아버지 숭어를 막 덮치는 순간 이놈이 그 마른 바위에서 팔딱팔딱 뛰어 바닷속으로 풍덩!!!
아~ 그 허망함!!!
나는 뻔히 보았다. 그 뒤로는 그 맑은 물에서 다시는 숭어를 볼 수도 없었음을-
우리 아버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망연자실의 그 낙담을-
어쩌면 그 사태가 우리 아버지께서 세상에 남긴 가장 커다란 마지막 발자국이었던 것도 같구먼-
내가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그 뒤로도 한두 번은 더 나를 싣고 어로에 나갔을 수도 있지만, 그 대부분도 우리 아버지 숨이 가빴기에 내가 노를 저었으리라!
그랬던 우리 아버지 지금의 내 나이보다 19년이나 적은 마흔셋에 운명하셨다.
운명하신 그 순간 아무도 없는 방안에 아버지와 나 오로지 단둘만이 남았던 그 순간에-
아버지 - 어머니가 지금 몹시 편찮습니다. 그러니 꼭 지켜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R5sh3Va5h10
~ 사랑 ~